약학대학
Dongguk University
[인터뷰] 이경 학장 "실패한 데이터는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기회였습니다"

암 표적 단백질 공략을 연구해 온 이경 교수(뒷줄 가운데)와 연구진 (사진 제공=이경 교수)
+ 2026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학술진흥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먼저 수상 소감을 여쭙고 싶습니다.
‘25회’라는 숫자 앞에서 먼저 든 생각은, 제가 이 상을 받았다기보다 이 상이 스물다섯 해 동안 자리를 지켜준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 개발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정리되지 않는 일입니다. 화합물을 합성한 연구원, 세포에서 그 효과를 확인해 준 동료, 표적을 찾아 준 공동연구자들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과학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 이 상의 슬로건을 오래전 처음 보았을 때는 이상을 외치는 구호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스물다섯 해치 수상자 명단을 놓고 보면,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사실을 적어둔 문장에 가깝습니다. 이 상이 해온 일은 상을 주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하고 있던 사람들을 드러내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명단에 한 줄을 보태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상을 완성된 성과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다, 아직 끝내지 못한 질문을 계속 붙들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치료제 개발이 어렵다고 여겨졌던 특정 암의 표적 단백질을 공략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접근법은 기존의 항암제 개발과 어떻게 다르고, 난치성 암 치료에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지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겠어요?
암을 일으키는 단백질이 무엇인지는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약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약이 되려면 그 단백질 표면에 화합물이 들어가 앉을 만한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의 상당수는 표면이 평평해서 붙잡을 데가 없습니다. 이런 표적을 ‘난표적(undruggable target)’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30년간 제가 해온 일은 이 표적들을 ‘약으로 만들 수 있는’ 쪽으로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첫째, 그 단백질이 혼자서는 일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짝이 되는 단백질과 손을 맞잡아야만 기능하는 경우라면, 단백질 자체 대신 그 맞잡은 손을 떼어놓습니다. 둘째, 표적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 그것을 켜는 상위 회로를 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암세포는 산소가 부족한 환경에서도 대사를 바꿔가며 살아남는데, 그 생존 스위치를 켜는 조절 인자를 거슬러 올라가 찾아낸 뒤 차단하는 방식입니다. 셋째는 앞의 둘과 방향이 반대입니다. 표적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수십 년간 연구된 단백질이라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저희는 세포 안에서 낡은 단백질을 분해하는 장치에서 그런 자리를 찾아냈습니다. 없던 열쇠 구멍을 새로 낸 셈입니다. 그래서 제 연구를 ‘표적 대신 주변을 공략한다’고만 요약하면 절반만 맞습니다. 우회도 하지만, 정면으로 돌아가 새 문을 여는 일도 함께 합니다.
+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자리’에 주목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일반인들도 어떤 목표물에 ‘꽂히면’ 시야가 좁아지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가 쉽지 않아지는 걸 경험하곤 하는데요. 익숙한 방법이나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그러한 역발상을 위해 연구자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새로운 방향이나 시도에 대한 관점이 어떤 극적인 계기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설명되지 않는 데이터에서 시작됐습니다. 원래 겨냥한 표적에서는 아무 효과가 없는데 세포 실험에서는 분명히 작동하는 화합물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실험이 잘못됐다고 보고 덮습니다. 저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이 화합물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제가 모르는 다른 곳에 붙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화합물을 실마리 삼아 표적을 거꾸로 찾아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조절 인자를 만났습니다.
그러한 역발상에 필요한 태도를 하나만 꼽으라면, 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바꾸는 용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 안 될까’를 붙들고 있으면 계속 같은 벽 앞에 서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체 어디에 붙고 있는가’로 질문을 옮기는 순간, 벽이 아니라 문이 보입니다.
+ 시상식에서 “사람은 흔들려도 데이터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소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는 신약 개발 연구에서 꿋꿋이 달려올 수 있었던 기준과 힘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흔들린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연구를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리는 쪽은 언제나 저 자신이었거든요. 약 하나가 환자에게 닿기까지는 10년, 15년이 걸립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제 확신은 여러 번 바뀝니다. 기대가 컸다가 조바심이 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내가 붙들고 있는 방식이 이미 낡은 것은 아닌가 싶어집니다. 주변의 평가에 마음이 흔들리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돌아가는 자리가 데이터였습니다. 데이터는 제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지만, 대신 없는 말을 지어내지도 않습니다. 기준은 단순했습니다. 이 결과가 다시 나오는가,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도 같은 말을 하는가. 이 두 가지를 통과하면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믿고 갔고,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내려놓았습니다.
연구의 어려움을 버티게 한 힘은 조금 다른 데 있었습니다. 실패한 데이터를 실패라고 부르지 않게 된 순간부터 연구가 견딜 만해졌습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화합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아직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 아홉 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 “사회가 진짜 필요로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학자의 역할”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약학대 학장으로서 학술·연구 현장에서 후배 연구자들의 성장을 이끄는 역할도 여기에 포함될 것 같습니다. 그간 국내 여성과학자의 연구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고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지난 30년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입구입니다. 제가 대학원에 들어갈 때와 비교하면 이공계 여성 연구자의 수는 비교할 수 없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그 비율이 급격히 줄어드는 구조는 여전합니다. 이제 문제는 진입이 아니라 지속과 결정권입니다. 학장 등 교내외 보직 소임을 맡아 일하면서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리더는 성과가 충분히 쌓인 뒤에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처해 보면서 자라납니다. 여성 연구자에게 부족했던 것은 역량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볼 기회였습니다.
제도적으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첫째, 이미 있는 제도가 실제로 쓰이게 하는 것입니다. 연구비 심사에서 출산과 돌봄으로 생긴 공백만큼 실적 산정 기간을 늘려 인정하는 규정은 이미 마련되어 있고, 성별에 관계없이 적용됩니다. 둘째, 돌봄이 여성만의 일이 아니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성 연구자가 돌봄 제도를 쓰는 일이 예외가 아니라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연구책임자와 평가위원, 정책 위원회의 구성에서 여성이 리더 역할을 경험할 통로를 의도적으로 열어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려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입니다.
+ 여학생과 여성 연구자들이 STEM 분야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없애는 일은 유네스코 과학 분야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여성과학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실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는 차세대 여성과학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나 격려의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지금 교실에 있는 여학생들에게는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성 과학자의 강점을 특정한 기질로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섬세하다거나 꼼꼼하다는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결국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미리 정해버립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으로서의 강점이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질문입니다.
제가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배경은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직 답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계속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하는 것을 고르기보다, 오래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을 고르십시오. 설령 앞에 롤모델이 보이지 않는다고 멈추지 마십시오. 제 앞에도 없었습니다. 없으면? 바로 여러분이 첫 번째가 되면 됩니다.